수집 일시: 2026년 09월 18일 01:07
14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극우 정당 ‘독일대안당(AfD)’의 후보 크리스틴 브링커가 베를린 주 선거를 앞두고 유세를 벌이고 있다.
며칠 뒤 일요일(20일)에 베를린 주의회 선거인데 거리는 조용했다. 선거 유세 확성기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모처럼 날씨가 좋아서인지 행인들은 즐거워 보였다. 문득 ‘이맘때면 베를린 마라톤인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선거일에 자리를 양보하고 다음 주 일요일, 그러니까 9월 27일에 열린다. 케냐 선수들이 이번에도 금메달을 가져가려나? 극우 정당인 독일대안당(AfD)이 만약 집권한다면 마라톤도 순수 독일인만 참여시킬 건가? 이런 불온한 생각을 하며 취재차 길을 나섰다.
조사하다 알게 된 기막힌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AfD 후보 크리스틴 브링커가 빌리 브란트 등 베를린 시장을 지냈던 이들 중에서도 역사에 남은 세 명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나란히 합성한 선거 포스터를 세웠다는 것. 브링커는 2023년 선거에서 9.1%에 그쳤던 AfD 지지율이 이번엔 13~18% 사이를 오간다니 벌써 시장 후보 자리까지 넘본다는 인물이다. 모든 베를린 신문이 흥분했다. 나도 흥분했다. ‘감히!’라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 포스터를 어디에 세웠는지도 모르는 채 일단 길을 나섰다.
오늘따라 유난히 외국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들의 운명은 어찌 되려는가. 먼저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갔다. 관광객들이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고, 스포츠 행사가 있는지 유니폼을 입은 청소년들이 교사들과 함께 단체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베를린 포츠담 광장을 퇴근길 자전거와 관광객들이 지나가고 있다. 평소와 다름없는 베를린의 일상이 무심하고 평온해 보인다.
불과 열흘 전 바로 이 자리에 경찰 추산 5000명, 주최 측 추산 1만 4000명이 모여 손전화와 손전등을 흔들며 ‘빛의 바다’를 만들고 “파시즘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팻말을 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오늘의 광장은 평화로웠다.
그날 저녁의 분노는 하루 전 작센안할트주에서 나온 선거 결과 때문이었다. 극우 정당 AfD가 43.8%를 얻어 주의회 선거 사상 최고 득표율을 기록하고, 집권 기민련은 17.2%로 역사상 최저치로 추락한 그 결과. 투표율은 77.8%, 역대 최고치였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깊이 충격 받았다”고 했다.
거기서 연방의회로 향했다. 마찬가지였다. 평화롭고, 무심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AfD 대표 알리스 바이델에게 “잘했다!”는 축하 메시지를 남기고, BBC와 <알자지라>까지 개표 속보를 실시간으로 다뤘을 만큼, 국제 사회는 이 나라의 선거에 이토록 관심이 많았는데 정작 거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했다.
티어가르텐 공원 벤치에 잠시 앉아 작전을 짰다. 신문 기사를 다시 검색해 보니 베를린 주의회 앞에 모든 정당의 포스터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 나타났다. 이거다 싶어 그쪽으로 향했다. 포스가를 지나 포츠다머 플라츠를 가로질러 슈트레제만가로 접어들었다. 거리도 광장도 햇빛을 즐기는 인파로 평화롭기만 했다.
집권 계획 발표하는 그들의 목소리
나치 시절 게슈타포(비밀국가경찰국)와 친위대(SS), 제국보안본부가 있던 자리에 세운 나치역사기록관 ‘테러의 지형’
드디어 베를린 주의회. 포스터는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 합성한 사진을 신문에 올린 것 같았다. 건물 앞 광장에 서 있는 거대한 폰 슈타인 청동상 옆에 흰옷을 입은 흑인 노인이 앉아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금발의 젊은 여인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림이 멋졌다. 폰 슈타인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흑인이, 다른 쪽에는 금발의 독일 여인이 앉아 있는 장면. 마치 나를 위해 일부러 포즈를 취해준 것 같았다. 프로이센의 개혁가 폰 슈타인은 이 둘을 다 넉넉히 품을 만큼 거대해 보였다.
베를린 주의회에서 비스듬히 오른쪽으로 째려보면 나치역사기록관 ‘테러의 지형(Topographie des Terrors)’이 보인다. 나치 시절 게슈타포(비밀국가경찰국)와 친위대(SS), 제국보안본부가 있던 자리에 세운 야외 및 실내 전시관이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우울해지지 않을까? 만약 AfD가 집권하면 저 ‘테러의 지형’이 박물관이 아니라 다시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끔찍한 망상을 떨구며 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꽤 많은 사람이 야외 전시관의 사진과 설명문을 읽고 있었다. 그 진지한 모습을 카메라에 잡으려는 순간 일부러 남겨 둔, 지금은 누더기 꼴을 한 베를린 장벽 너머로 웅장한 건물이 마침 햇살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났다. 지금은 연방 재정부가 쓰고 있지만, 2차 세계 대전 후 동독이 수립된 바로 그곳이다. 그러나 원래는 나치 시절 헤르만 괴링이 세운 호화로운 제국항공부였다. 방이 2000개가 넘고 내부 동선이 거의 7km라니, 사실상 궁전 규모다. 건물 앞을 지나가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미로와 같은 7km의 동선은 첩보 소설의 무대가 될 법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블록 하나를 다 차지하는 건물을 힘겹게 돌아가니 어느새 라이프치히가로 접어들었다. 거기서 드디어 AfD 선거 포스터를 발견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유심히 보았지만 AfD 포스터는 단 한 장도 없었다. 그런데 라이프치히가에 접어들자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거리 전체가 ‘AfD 포스터 거리’가 되어 있었다. 가로등마다 빠짐없이 붙어 있었다.
라이프치거 광장 가로등에도 AfD 선거 포스터만 붙어 있다. 가장 먼저 포스터를 붙이기 때문에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
독일은 선거 포스터를 건물 벽이 아니라 가로등 같은 도로 시설물에, 그것도 지자체 허가를 받아 붙이는 게 관행이다. 잠시 멈춰 서서 검색해 보니, AfD는 포스터 게시가 허용되는 시점 전날 밤에 가장 좋은 길목의 가로등을 먼저 점령해 버린다고 한다. 선거전이 투표함뿐 아니라 거리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게 실감 났다.
사실 나는 크리스틴 브링커가 빌리 브란트와 나란히 찍힌 포스터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는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날 아침 방송에서 내보낸 짧은 보도가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제목은 “권력 인수 – 작센안할트 AfD의 계획”. 집권 계획을 발표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들떠 있었다.
내용은 소름이 끼쳤다. 학교에서는 나치 시대 비중을 줄이고 오토 대제, 루터, 비스마르크 같은 인물을 늘린 역사 교육을 하겠다고 했다. “죄의식의 대물림”을 끝내고 “건강한 애국심”을 기른다는 명분이었다. 반인종주의 네트워크 지원과 강제수용소 견학은 끊겠다고 했다.
이민자는 도시 외곽에 모아 수용하고 추방을 전담할 전담 조직을 신설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경찰 곁에 “자원 시민경비대”를 두어 “질서와 청결”을 지키게 하겠다고 했다. 기민련의 치안 담당 의원조차 “검은 옷을 입은 폭력배 조직”이 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나치 시절의 돌격대가 겹쳐 보이는 건 나만이 아니었던 셈이다.
이상한 건 애국심이라는 단어였다. 한국인이 애국심을 말하면 당연하고 정당해 보이는데, 독일인이 애국심을 말하면 왜 이렇게 서늘한가. 아마도 그 단어가 가리키는 과거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한쪽은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던 기억이고, 다른 한쪽은 저지른 것을 지우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베를린은 다를까? 산술적으로는 그렇다. 이번 선거에서 AfD 지지율은 13%에서 18% 사이, 43.8%를 얻은 작센안할트와는 비교가 안 된다. 다만 좌파당과 기민련이 근소한 차이로 선두를 다투는 이 팽팽함이 어떤 식으로든 다른 문을 열어주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다고 나는 아직 확언할 수가 없다.
평소에 자주 다니고 좋아하는 라이프치히가가 AfD 포스터 거리가 된 것을 보니, 나치 시대 거리마다 내걸렸던 어마어마한 깃발의 행렬이 떠올랐다. 지금은 포스터 규격이 제한되어 있어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이들이 집권하는 경우 하늘색의 긴 휘장이 거리를 뒤덮는 환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베를린의 외국 음식점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몇 시간을 걸은 탓에 시장기가 느껴졌다. 귀가하는 길, 맛집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데 모두 외국 음식점들이다. 베를린에 독일 음식점이 있기나 한가? 한국, 일본, 이탈리아, 태국, 포르투갈, 인도, 그리고 팔라펠 가게, 다 사라지겠지? 그런데 대체 AfD 당원들은 어디 가서 순수한 독일 음식을 먹겠다는 걸까?
일요일까지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약 250만 명의 베를린 시민이 투표권을 가지고 있고, 이번엔 처음으로 만 16세부터 투표할 수 있다. 그날 밤 무엇이 확정되든, 사람들이 가장 먼저 확인할 숫자는 1위 정당의 득표율이 아닐 것이다. AfD의 숫자일 것이다. 하루 종일 걸으며 내가 본 것은 평화로운 도시였다. 하지만 그 평화 밑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는, 가로등에 붙은 포스터의 수와 오늘 아침 뉴스의 들뜬 목소리가 이미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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