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 일시: 2026년 09월 16일 15:03
세계의 미각 홀리다…취향저격 K농업 [스페셜리포트]
박수호 · 최창원 · 김나연 기자
입력 : 2026.09.11 11:01:47
수정 : 2026.09.16 12:55:09
장면. 최근 서울 강남에 아시아 1호점을 연 미국 외식 업체 치폴레. 인기 메뉴에는 낯익은 식재료가 담겨 있다. 전남 해남에서 계약재배한 국산 장립종 쌀 ‘IPS’다. 치폴레와 국내 운영사 빅바이트컴퍼니는 글로벌 본사의 품질 기준에 맞춰 국내 공급망을 구축했다. 쌀뿐 아니라 양파·고수·할라피뇨 등 주요 식재료 대부분을 국내에서 조달한다. 쌀을 공급하는 땅끝황토친환경영농조합법인은 연간 200t, 전체 생산량의 절반을 치폴레에 납품한다. 연간 물량과 가격을 미리 정하는 계약재배 방식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 쌀이 우연히 선택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윤영식 땅끝황토친환경영농조합법인 대표는 “진중현 세종대 교수가 국제벼연구소 시절부터 개발해온 침수저항성 인디카 품종을 2023년 기술이전받아 상업화했고, 미국 수출 과정에서 갖춘 FDA 시설 등록·코셔·미국 유기농 인증 덕분에 납품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치폴레는 IPS의 낟알 형태와 식감에 맞춰 한국 지점 레시피까지 새로 짰다. 진 교수는 “레시피는 일종의 지식재산이고 이를 유지하는 힘은 균일한 품질의 식재료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채널”이라며 “글로벌 기업이 재배 기획 단계부터 국내 농가와 손잡는 K농업의 새 공식”이라고 평가했다.
농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농산물 시장도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새로운 품종이 잇따라 등장하고 수출 농가도 늘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올해 1~7월 ‘K-푸드+ 수출액(기존 농식품 수출에 전후방 연관 산업 수출 실적 합산액)’은 83억20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5.3% 늘며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포도 수출은 35%, 배는 55.2%, 딸기는 15.7% 증가했다. 국내 소비에 기대던 쌀도 ‘임금님표 이천쌀’이 올 들어 호주·미국·일본에 잇따라 수출됐다.
농산물만 나가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농기계·농약·비료·종자 등 농산업 수출액은 32억2000만달러로 역대 최대였다. 한국에서 농사짓는 기술과 방식 자체가 수출 상품이 된 셈이다.
투자도 늘고 있다. 농식품 모태펀드는 지난해 3179억원 규모 자펀드를 결성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올해는 스마트농업·그린바이오·푸드테크 분야에 1000억원을 별도로 배정했다. 품종·AI·로봇·수직농장·가공을 결합해 부가가치를 높이고, 생산부터 유통·수출까지 설계하는 ‘농업 CEO’가 등장한 배경이다. 한가위를 맞아 한적한 농어촌의 이미지를 넘어 빠르게 변하는 K농업의 현장을 주요 트렌드로 묶어봤다.
도심(서울 양재동) 내 있는 마이크로그린 스마트팜 ‘셀포트’. (셀포트)
신농업 트렌드 5 살펴보니
농사도 ‘기획’하는 시대
농업의 공식이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얼마나 많이 생산하고 얼마나 크고 달게 키우느냐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소비자 취향부터 해외 시장 선호도까지 따진다. 같은 과일이라도 맛과 색, 식감을 달리한 품종이 등장하고 해외 시장에 맞춘 별도 품종이 개발된다. 농산물뿐 아니라 종자와 농기계, 스마트팜 기술도 해외로 나간다. 계절의 한계를 넘는 재배 방식과 품종 자체를 브랜드로 키우는 시도도 늘고 있다.
트렌드 ➊ 맛·식감·용도까지
농산물도 ‘취향 소비’ 시대
전남 나주에서 오랫동안 ‘신고’ 배를 키워온 김지현 해오름영농조합법인 대표는 최근 다른 품종으로 눈을 돌렸다. 익어도 껍질이 초록색인 ‘설원’과 ‘슈퍼골드’다. 김 대표는 “소비자에게 다양한 맛의 배를 선보이고 싶어 품종 갱신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초록색 배를 낯설어하던 소비자도 맛을 본 뒤 다시 찾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배 재배 시장은 오랫동안 신고 품종 중심으로 움직였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신고 재배면적은 전체 배 재배면적의 85.4%에 달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공식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신고 외 품종을 찾는 이들이 늘면서다. 그중 대표적인 게 설원과 슈퍼골드, 그린시스다. 설원은 평균 당도가 14브릭스 이상이다. 식감도 아삭한 편이다. 슈퍼골드는 당도 13.6브릭스 수준에 은은한 산미가 특징이다. 그린시스는 당도는 12.3브릭스로 상대적으로 낮지만 과즙이 풍부하다. 상온에서 약 30일까지 저장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같은 배라도 단맛과 산미, 과즙, 식감에 따라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생긴 셈이다.
취향 변화는 쌀에서도 나타난다. 국내에서 주로 먹는 짧고 둥근 자포니카 대신 길쭉한 인디카 계열의 장립종을 재배하는 시도가 대표적이다. 전남 해남의 땅끝황토친환경영농조합법인은 2021년 세종대와 산학협력을 맺고 기후변화에 강한 장립종 품종 개발에 뛰어들었다. 이후 매년 300여종의 벼를 시험 재배하고 염해 실험을 진행했다. 2023년에는 침수저항성을 갖춘 ‘IPS’를 기술이전받아 상업 재배를 시작했다. 재배면적은 2023년 7㏊에서 2024년 21㏊, 현재는 100㏊까지 늘었다.
출발점은 쌀도 취향에 따라 소비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윤영식 대표는 “처음에는 미식과 취향 쌀이라는 관점에서 틈새시장으로 봤다”며 “외국인이 늘고 볶음밥이나 카레처럼 요리에 맞는 쌀을 찾는 수요도 생기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고 말했다. 이에 ‘날씬한미’와 ‘롱그레인’에 이어 볶음밥용·카레용·포케용 장립종 쌀도 내놨다.
시장 반응은 긍정적이다. 최근 국내 매장을 연 치폴레에 연간 약 200t을 공급하고 있다. 전체 생산량의 절반 수준이다. 치폴레 측은 한국산 장립종 특유의 풍미와 조리 적합성을 높게 평가했다. 네비엘 판타키 치폴레 조리 부문 수석부사장은 “한국산 장립종은 깔끔하면서도 향긋한 풍미가 있다”며 “치폴레 특유의 식감과 맛을 구현하는 데 잘 맞았다”고 말했다.
트렌드 ➋ 농산물도 ‘브랜딩’
상표 출원 5년 새 40% ‘쑥’
품질 좋은 농산물을 생산하더라도 소비자 선택을 못 받으면 지속 가능한 생업으로 자리 잡을 수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브랜딩’이다.
농산물 브랜딩은 단순히 예쁜 포장재를 입히거나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니다. 재배 철학과 지역적 특성, 엄격한 품질과 스토리를 종합적으로 전달해 독자적인 신뢰를 구축하는 고부가가치 창출 과정이다. 다소 가격이 비싸더라도 오렌지는 ‘썬키스트(Sunkist)’, 바나나는 ‘돌(Dole)’, 키위는 ‘제스프리(Zespri)’를 주저 없이 선택하게 만드는 힘이 여기서 나온다. 이는 소비 취향이 점차 다변화되고 소비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오늘날의 트렌드와도 부합한다.
이에 발맞춰 브랜딩에 도전하는 농가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특허청에 따르면, 농산물·농산물 가공식품 관련 상표 출원량은 2014년 1만4613건에서 2019년 2만514건으로 5년 만에 40% 이상 증가했다. 특히 청년층 농업인과 가업을 잇는 후계농을 중심으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달석 농업문화원 원장은 “고령층이 다수인 농가들은 여전히 농협 계통 출하에 의존하는 경향이 크지만, 직거래와 온라인 마케팅 생태계를 이해하는 청년 농부들은 농산물 브랜드화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소셜미디어(SNS)는 소규모 농가의 개인 브랜딩 문턱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전북 부안에서 ‘양자양 행복농장’을 운영하는 양자양 대표는 SNS 브랜딩을 적극 활용해 귀농 4년 만에 이름도 생소한 ‘땅콩호박’ 농사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그는 소비자로 접했던 땅콩호박에 매료돼 재배까지 나서게 된 진정성 있는 스토리, 시골 생활의 희로애락, 땅콩호박 재배 과정 등을 유튜브와 블로그에 업로드하고 있다. 양 대표는 “올해 긴 폭염으로 병해충 피해가 기승을 부릴 때도, 직접 친환경 농약을 만들어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공유했다”며 “이 과정 자체를 응원하는 소비자들, 친환경 농법에 관심을 갖는 소비자들의 주문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특이 작물만 브랜딩 대상인 건 아니다. 경북 영주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이경미 대표는 7년 전에 상표를 ‘소백산유진맘’으로 바꾸며 브랜딩을 시작했다. 상표에 소백산의 청정함과 딸의 이름을 결합했고, 농산물 직거래 커뮤니티에 매일 사과 상태를 공유하며 ‘정직한 엄마 농부’ 이미지를 구축했다. “착색제를 쓰지 않아 색은 덜 곱지만 맛은 좋다” “조금 일찍 따서 떫지만 샐러드용으로 최적”이라는 식이다.
농산물 브랜딩은 도매시장 경매나 농협 수매에만 의존하던 농가에 판로 다각화의 길도 열어줬다. 진혜련 국립한국농수산대 외래교수는 “직접 직판매 유통 채널을 뚫을 수도 있고, 대형 유통사에 납품되더라도 포장재에 제조원으로 농가 브랜드명이 명기된다”며 “소비자가 농가와 직접 거래로 유입되는 선순환 구조로 브랜드가 농가의 강력한 자산으로 작동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트렌드 ➌ ‘농산업’도 수출
농기계·스마트팜 각광
지난 7월 아랍에미리트(UAE)에서 한국 스마트팜 기업 아그로솔루션코리아가 260만달러 규모 공급 계약을 따냈다. UAE 현지 기업 알파파에 식물공장형 스마트팜을 공급하는 계약이다. 갑자기 성사된 거래는 아니다. 아그로솔루션코리아는 2024년부터 현지에서 80만달러 규모 실증 사업을 진행했다. 사막 기후에서 실제로 딸기를 재배하며 설비와 재배 기술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검증했다. 약 2년간의 실증이 본계약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국 농업의 수출 품목이 넓어지고 있다. 기존에는 쌀과 딸기, 포도처럼 농장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해외에 파는 것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트랙터와 종자, 비료, 농약은 물론 온실과 재배 시스템까지 수출한다.
농림축산식품부도 이를 ‘농산업 수출’로 별도 집계한다. 지난해 농산업 수출액은 32억4000만달러로 전년보다 9% 늘었다. 관련 통계를 공식 집계하기 시작한 2022년 이후 최대 규모다.
가장 비중이 큰 품목은 농기계다. 지난해 농기계 수출액은 13억5000만달러로 전년보다 10.8% 증가했다. 올해 상반기 수출도 7억6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3.2% 늘었다.
농기계 업체의 사업 구조도 이미 해외 시장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대동은 올해 상반기 북미에서 중대형 트랙터 ‘HX’ 판매량을 전년보다 55% 늘렸다. 스키드로더와 미니굴착기 같은 소형 건설장비 판매도 28% 증가했다. 판매망도 30곳을 추가로 확보해 600곳으로 늘렸다. 유럽법인 매출도 같은 기간 31% 증가한 741억원을 기록했다. 국내 농촌에서 쓰던 소형 트랙터를 수출하는 데서 벗어나 해외 농장의 크기와 작업 환경에 맞춰 제품군까지 넓히는 모습이다. 원유현 대동 대표는 “글로벌 농기계 시장 침체 속에서도 제품 포트폴리오와 유통 경쟁력을 강화해 2분기와 상반기 모두 역대 최대 매출을 달성했다”고 강조했다. TYM 역시 올 상반기 해외 매출을 기반으로 호실적을 냈다. 매출 5522억원, 영업이익 626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3.1%, 59.1% 증가한 수치다.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중대형 트랙터 판매 비중을 높이는 전략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앞선 아그로솔루션코리아 사례처럼, 스마트팜도 ‘수출 효자’로 각광받는다. 특히 스마트팜은 시설 하나를 파는 데 그치지 않고 재배 기술과 운영 노하우까지 묶는 ‘패키지 수출’이란 점에서 부가가치가 크다.
스마트팜 기업 엔씽의 김혜연 대표는 “시설과 재배 기술, AI, 운영 노하우 가운데 하나만 수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하나로 묶어 제공하는 게 핵심”이라며 “종자와 품종, 재배 레시피까지 설비와 함께 나가는 것이 한국 스마트팜의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스마트팜이 수출 효자로 떠오르면서, 어떤 작물을 키울지도 중요해지고 있다. 제한된 공간에서 짧은 기간에 여러 번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품목 가운데 하나가 ‘마이크로그린’이다. 새싹채소와 다 자란 잎채소의 중간 단계에서 수확하는 작물로 파종 후 7~14일이면 수확할 수 있다. 떡잎기에 수확해 종자 본래의 영양소와 초기 광합성 대사산물이 겹쳐 있어 영양 밀도가 높고, 세포벽 리그닌화가 진행되지 않아 식감이 부드러우면서도 풍미가 뛰어나다. 생육 기간이 워낙 짧아 병해충이 번식할 틈이 없다 보니 밀폐형 시설 재배 시 농약을 쓸 필요가 없는 것도 강점이다.
서울 양재동에서 도심형 식물공장을 운영하는 셀포트도 이런 가능성에 주목했다. 반도체 클린룸 공조 기술을 바탕으로 수직농장을 구축한 강세명 셀포트 대표는 “마이크로그린은 품목에 따라 연간 24~30사이클을 운영할 수 있어 일반 엽채류보다 회전율이 2배 높다”며 “잎이 짧아 층간 간격을 200~250mm 수준으로 줄일 수 있어 같은 층고에서도 재배단수를 1.5~2배 늘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엽채류보다 요구 광량이 적어 조명과 냉방 전력비를 크게 줄일 수 있고, 자체 보유한 미활용에너지 회수 기술을 결합해 현장 계측 기준 에너지를 33.9% 절감하기도 했다.
경제성 면에서도 경쟁력을 갖췄다. 시설 상추가 kg당 수천원대에 머무는 반면 마이크로그린은 kg당 3만~6만원대에 거래돼 단위 면적당 매출 잠재력이 크다. 신축 대신 모듈러 설비를 소비지 인근에 배치해 초기 투자비와 물류 거리를 줄인 점도 주효했다.
현재 셀포트는 연중 균일한 품질을 요구하는 호텔과 파인다이닝 등 B2B 공급망을 다진 데 이어, 온라인 스토어를 중심으로 B2C 정기구독 모델을 확대하고 있다. 나아가 브로콜리의 설포라판 전구체 등 유효성분 함량을 정밀 제어해 건강기능식품과 화장품 소재 등 고부가가치 바이오 원료 시장까지 공략한다는 구상이다.
서울 강남에 아시아 1호점을 연 미국 외식 업체 치폴레 인기 메뉴에는 전남 해남에서 계약재배한 국산 장립종 쌀 ‘IPS’가 사용된다.
트렌드 ➍ 수출 맞춤형 농업
남는 품종 말고 ‘팔릴 품종’ 만든다
‘농산물=내수용’ 공식도 깨진 지 오래다. 해외 시장에 맞춰 품종부터 생산 방식과 출하 시기까지 조정해 수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지난 7월 충남 논산에서 재배한 샤인머스캣 25t이 베트남과 캐나다로 향했다. 수출액은 20만달러, 약 2억9000만원 규모다. 눈길을 끄는 것은 물량보다 준비 과정이다. 논산시와 손잡은 농업회사법인 유베리는 지역 포도 농가 54곳을 하나로 묶었다. 수입국이 요구하는 품질 기준에 맞춰 생산하고 공동선별과 포장, 출하까지 함께 관리했다. 농가가 제각각 포도를 키운 뒤 좋은 상품만 골라 해외로 보내는 방식과는 다르다.
정부도 ‘수출 맞춤형’ 농업을 강조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올해 포도·딸기·배·파프리카 4개 품목에서 국산 신품종 18종을 선정했다. 품종 선정 때부터 해외 소비자 선호와 기후변화 대응력 등을 함께 고려했다. 농가에는 재배 매뉴얼과 묘목, 영농자재를 지원하고 수출통합조직을 통해 출하 약정도 맺는다. 지난해 이 사업을 통해 해외로 나간 국산 신품종은 590t, 358만달러 규모다. 올해 목표는 수출 실적을 전년보다 10% 이상 늘리는 것이다.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해서는 ‘맛’ 하나로는 부족하다. 농장에서 수확한 과일은 선별장과 물류센터를 거쳐 비행기나 배에 오른다. 이후 현지 물류센터를 지나 매대까지 도착하려면 며칠이 걸린다. 이 때문에 ‘얼마나 오래 버티는가’가 품종 경쟁력이다.
예를 들어 딸기는 쉽게 물러지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수출용 딸기 품종에서는 당도뿐 아니라 과육의 단단함과 유통 가능 기간이 중요한 기준으로 꼽힌다. 국산 품종 ‘골드베리’가 대표적이다. 과육이 단단하고 유통기한이 길어 수출에 적합하도록 육성됐다. 품종을 개발한 뒤에는 농가별 재배법을 맞추고 선별과 포장까지 관리해야 한다. 해외 매대에 도착했을 때 품질이 들쭉날쭉하면 반복 주문으로 이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해외 소비자의 취향도 맞춰야 한다. 농식품부가 수출 확대 포도 품종으로 꼽은 ‘레드클라렛’과 ‘글로리스타’는 모두 붉은색 계열이다. 경북농업기술원은 붉은색 과일을 선호하는 동남아 시장을 겨냥해 이들 품종을 프리미엄 수출용으로 육성하고 있다. 레드클라렛은 진한 붉은색과 높은 당도, 아삭한 식감이 특징이고 글로리스타는 포도알이 크고 저장기간이 길다. 실제 레드클라렛은 지난해 7월 싱가포르와 태국에 시범 수출돼 현지 시장성을 시험했다. 샤인머스캣에 집중된 수출 구조에서 벗어나 해외 소비자의 색깔과 맛 선호에 맞는 품종으로 선택지를 넓히려는 전략이다.
수확 시기도 중요하다. 배 사례가 대표적이다. 현재 주력 수출 품종인 ‘신고’보다 일찍 수확할 수 있는 품종을 함께 키우면 해외에 배를 공급할 수 있는 기간을 늘릴 수 있다. 농식품부가 ‘신화’ ‘창조’ ‘화산’ 등 조생종을 수출 확대 품종으로 키우는 이유다. 특히 신화는 신고보다 수확 시기가 15일 이상 빠르다. 농식품부는 이런 품종을 활용해 수출 가능 기간을 넓히고 호주·인도네시아 등 새로운 시장도 공략할 계획이다.
수출 맞춤형 농업의 성과도 조금씩 나타난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올해 7월 말까지 한국산 포도 수출액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35% 증가했다. 배는 55.2%, 딸기는 15.7% 늘었다. 아직 전체 농식품 수출에서는 가공식품 비중이 훨씬 크지만 신선 농산물의 해외 시장 존재감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트렌드 ➎ 사계절 농업
계절 경계 허무는 수직농장
‘제철 공식’도 깨지고 있다. 계절에 맞게 작물을 키우던 농업이 온도·빛·품종·AI를 활용해 생산 시기를 직접 설계하는 ‘사계절 농업’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딸기가 그중 하나다. 국내 딸기 생산은 12월부터 이듬해 5월에 집중된다. 저온성 작물이라 여름철 재배가 쉽지 않아서다. 겨울철 국내 딸기 생산량은 약 17만t에 달하지만 여름철 유통 물량은 연간 1000~2000t 안팎에 그친다. 여름에도 겨울철 수요의 4분의 1만 유지된다고 가정하면 추가로 필요한 물량만 약 4만t이다. 농업계가 ‘사계절 딸기’에 주목하는 이유다.
대표적인 업체가 아그로솔루션코리아다. 일단 딸기밭을 아예 건물 안으로 옮겼다. 세종과 대전 수직농장에서 온도와 습도, 빛을 조절해 여름에도 딸기를 생산한다. 재배 베드가 좌우로 움직이는 ‘무빙 베드’를 활용해 통로를 줄이고 같은 면적에서 더 많은 딸기를 키운다. LED와 냉방시설, 양액 공급도 세밀하게 조절한다. 덕분에 한여름에도 당도 9~11브릭스 수준을 유지한다. 이상훈 아그로솔루션코리아 대표는 “기존 농가가 딸기를 생산하기 어려운 여름철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며 “겨울철에는 재배를 쉬거나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다른 사업을 추진한다”고 말했다.
대형 ‘여름 딸기 공장’도 등장했다. 농업회사법인 에스피아그리가 충남 서산에서 운영하는 하이테크팜은 약 7000평 규모다. 겉으로는 비닐하우스지만 내부에는 각종 자동화 설비가 들어섰다. 네덜란드 프리바의 환경제어 시스템과 블루라딕스의 인공지능(AI) 자동제어 기술을 비롯해 3중 차광 스크린, 공기열 히트펌프, LED 보광, 대형 냉방·가습 설비를 갖췄다. 바깥 날씨가 갑자기 변해도 딸기가 받는 빛의 양과 배지 수분, 양액 농도를 자동으로 조절한다. 에스피아그리는 지난해 40여개 딸기 품종을 시험한 뒤 여름 재배에 적합한 품종을 추려냈다. 하루 수확량도 지난해 200㎏ 미만에서 올해 400~600㎏ 수준으로 늘었다.
스마트팜 애그테크 기업인 퍼밋은 사계절 농업의 최대 약점인 에너지 비용을 낮추는 데 초점을 맞췄다. 실내 농장의 고질적인 약점인 전력 사용량을 낮추며 생산성을 높이는 데 집중한다. 수냉식 LED와 신소재 제습 설비, 이동식 광원 구조 등을 적용해 기존 스마트팜보다 에너지 사용량을 38.4% 줄이고 생산성은 20% 이상 높였다는 설명이다.
엔씽 사례도 눈여겨볼 만하다. 엔씽은 경기도 이천에서 컨테이너형 수직농장 ‘큐브’ 28동을 운영해 유럽형 상추와 루꼴라, 고수 등 채소를 연중 생산한다. 생산한 채소는 이마트와 삼성웰스토리 등으로 공급한다. 각각의 큐브에서 온도와 습도, LED, 이산화탄소, 수분과 양분을 따로 조절할 수 있어 한 농장에서도 서로 다른 작물을 동시에 기를 수 있다. 빛을 언제 얼마나 비추고 온도와 양분을 어떻게 조절해야 원하는 맛과 크기가 나오는지를 작물별 데이터로 축적·적용해 일정한 품질을 구현하는 방식이다. 김혜연 엔씽 대표는 “기술이 계절을 넘어서도 시장은 여전히 계절을 기억한다”며 “모든 작물을 사시사철 만드는 것보다 비쌀 때와 없을 때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논에서는 일종의 ‘회전율 개선’ 실험을 진행 중이다. 충남농업기술원이 개발한 초조생종 벼 ‘빠르미’가 대표적이다. 이앙부터 수확까지 약 80일 안팎이면 된다. 130일 안팎인 삼광벼보다 생육 기간이 약 50일 짧다. 덕분에 같은 논에서 빠르미를 두 차례 재배하거나 옥수수·감자·강낭콩 등과 이모작하는 것이 가능하다. 최근에는 한 번 모내기로 벼를 두 번 거두는 ‘움벼 재배’까지 실증했다. 8월 초 빠르미를 수확한 뒤 밑동을 남겨 새순을 다시 키우는 방식이다. 논을 갈고 모를 새로 심는 과정 없이 물과 소량의 비료만 공급해 10월 말 다시 수확한다. 실증에서는 1차 수확량의 약 20%를 추가로 거둘 것으로 예상됐다. 전문가들은 농업의 공식이 기술과 데이터에 의해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이기원 서울대 푸드테크학과장은 “농업이 산업으로 성과를 내려면 타 분야 첨단 기술과의 융합, 비즈니스 모델 연결, 그리고 기술·테크·시장을 아우르는 통합적 연계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마트팜 기업 엔씽은 경기도 이천에서 컨테이너형 수직농장 ‘큐브’ 28동을 운영해 유럽형 상추와 루꼴라, 고수 등 채소를 연중 생산한다. 사진은 엔씽 스마트팜 큐브에서 직원이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작물의 생육 상태 점검을 하고 있는 모습. (엔씽)
“잘 파는 농업으로 전환해야”
낡은 규제 걷고 ‘시장 중심’으로
한국 농업 기술 수준은 글로벌 톱티어 수준까지 올라왔다. 문제는 실제 농가 수익과 기업 성장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약하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이 K농업의 다음 과제로 ‘시장 중심 전환’을 꼽는 이유다.
민승규 한국농업벤처대 설립자는 “한국의 IT 기반 스마트팜 기술 수준은 아시아 소농 모델 중에서는 꽤 높지만 규모가 작아 농업 전체의 가격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시장 중심’ 체질 개선을 강조한다. 새로운 품종이나 스마트팜 시설을 먼저 만들고 나중에 판로를 찾는 방식으로는 수익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어떤 작물을 누구에게, 언제, 얼마에 팔 것인지 정한 뒤 필요한 기술과 시설을 역으로 설계하라는 조언이다. 이기원 학과장은 “한국은 유전자 가위 등 바이오 첨단 기술 분야에서 상당한 연구 역량을 보유했지만 실제 산업화와 고수익 창출로 이어지는 스케일업(Scale-up) 단계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며 “신품종을 개발해놓고 시장을 찾을 게 아니라 시장성이 담보된 비즈니스 모델을 먼저 정의하고 여기에 필요한 기술을 확보하는 시장 중심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스마트팜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첨단 설비를 들였다고 수익이 자동으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생산량이 증가해도 감가상각비와 전기료, 유지보수비, 금융비용이 더 빠르게 늘면 농가 소득은 오히려 줄 수 있다. 정원호 부산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단독 농가가 비싼 초기 투자비를 감당하기 어렵다면 지역 단위 공동 운영 체계를 구축해 에너지 설비와 물류, 브랜드화를 함께 추진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조언했다.
아울러 농가가 스마트팜 시설을 제대로 활용하도록 만드는 교육도 중요하다. 이정민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원은 “스마트팜을 도입한 농가가 비용 지출을 감수하고 생산성을 회복하기까지 적어도 2~3년이 걸리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최근 1년간 스마트팜 관련 교육을 받은 농가는 전체의 26%, 컨설팅을 받은 농가는 14.4%에 불과한 만큼 적극적인 교육과 컨설팅 지원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낡은 법과 행정 체계는 뜯어고쳐야 할 과제다. 농업에 AI와 로봇, 데이터, 에너지, 물류가 결합했지만 법과 행정은 여전히 ‘농지에서 농민이 작물을 재배하는 행위’를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전문가들은 개별 규제를 하나씩 푸는 방식보다 농업의 법적 분류 자체를 기능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창길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특임교수는 “스마트팜과 수직농장은 농업이면서 건축·에너지·정보통신 산업이고 농촌융복합 산업 역시 생산뿐 아니라 가공, 체험, 숙박과 판매가 결합한 형태”라며 “새로운 농업을 과거 산업 분류에 맞춰 규제하기보다 농업과 지역에 어떤 가치를 만드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출 전략 역시 다시 짜야 한다. 농산물이나 종자 하나가 아니라 ‘농업 시스템’을 수출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전문가 의견이 모인다. 글로벌 종자 기업과 범용 품종 수나 R&D 투자 규모로 정면 대결하기보다는 한국이 강점을 가진 종자와 AI, 데이터, 스마트팜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민승규 설립자는 “글로벌 거대 기업과 종자 하나만으로 경쟁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종자 로열티에 최적의 환경 제어 레시피와 AI·데이터 기술을 결합한 ‘K-애그테크 패키지’ 형태로 수출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 역할도 농업 시설 보조 중심에서 시장과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다. 정부가 시설부터 공급하고 판로를 나중에 고민하면, 특정 품목에 생산이 몰리거나 시장성 없는 사업이 연명할 가능성이 있다. 민간이 시장성을 검증하고 정부가 초기 위험과 기반 투자를 분담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김창길 특임교수는 “정부 지원 이후에도 시설 수가 아니라 농가소득과 비용 절감, 매출과 수출 성과를 평가해야 한다”며 “스마트팜 수출 역시 온실과 기자재에 종자, AI 재배기술, 교육, 금융, 현지 인력 양성과 사후관리까지 결합한 K-농업 통합솔루션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수호·최창원·조동현 기자,김나연 인턴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77호·추석합본호(2026.09.16~09.2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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